콘트랄토와 피아노를 위한 모노드라마

(콘트랄토 한형경에게 헌정되었으며 그녀에 의해 독일 드레스덴에서 초연됨/ 2004-5-19)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 놓고 금방울을 간격하여 달되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방울, 한 석류, 한 금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갈 때에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28:33~35)

곡목해설

   종소리화성의 연구가 음악사적인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성서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것은 그 목적이, 주지하는 바와 같이, 어떤 인위적인 이론이나 원칙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이미 만들어 놓은 질서를 찾아가는데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종소리에 관한 이야기가 성경에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새롭게 발견된 어떤 원소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를 발견하는 작업의 중요성이, 그 원소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없다고 해서 전혀 축소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성경은 다른 관점에서 종소리에 관해 매우 중요한 말씀을 증거하는 데 바로 위에 기록된 말씀이 그것이다. 한글 성경에서는 ‘방울’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 ‘파아몬’은 영어로는 ‘bell’로 번역되는 단어로 사실 그 모양은 옆의 사진을 볼 때 종과 방울의 중간형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울보다는 차라리 옷에 달 수 있는 정도의 작은 종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위의 성경말씀은 종소리가 갖는 또 다른 성서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위 말씀은 종소리가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차대한가를 나타낸다. 성경에서 종소리는 울려도 되고 안 울려도 되는 소리가 아니라 반드시 울려야 하는 소리, 그것도 만약 울리지 않으면 대제사장이 죽게 되는 그런 필연적인 소리로 나타난다. 결국 종소리는 생명을 보장하는 소리요, 그만큼 귀중한 소리였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예복에 소리 잘 나는 작은 종들을 다는 것은 마치 생명을 보장받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종소리는 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기러 지성소에 들어갈 때, 들어가서 섬길 때, 그리고 나올 때 나는 소리이니, 종소리는 또한 그가 지속적으로 살아있다는 증거요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증거다. 또한 신약시대가 만인제사장 시대임을 생각한다면 이 제사장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으니, 종소리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나아가 이 소리는 제사장이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실 때 나는 소리였으니 이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사실 성소라는 곳은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다. 이 작은 공간에서 제사장은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체험하며 - 지속적인 종소리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꿈에서라도 그가 종소리를 듣는다면 아마도 하나님의 임재를 반사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요 곧 매무새를 가다듬고 하나님을 섬길 준비를 할 것이다. 성경에 찬양을 목적으로 하는 것 외에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도록 명령하신 것이 또 있다면 그것은 은나팔에 관한 이야기, 또 기드온의 전쟁 때 쓰인 나팔 등이 있을 것이다. 그 나팔 소리는 모세가 백성이 어떻게 나아갈 바를 명할 때라든가, 또는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로, 또는 화목제물을 드릴 때 다양한 방법으로 불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며,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것을 상징하며 그 소리로 말미암아 제사장의 생명이 보장되며 동시에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생명과도 같은 의미의 소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종소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생명을 보장해주는 소리임을 다시 생각해보자. 사실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면 반드시 죽게 되어있다. 그런데 종소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감을 허락받았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바로 신약에서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리고 바로 여기에 종소리의 신학적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종소리를 “audible blood of Jesus”(귀로 들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라고 명명해보았으며 이와 같은 의미를 담아 앨토와 피아노를 위한 모노드라마 “The Sound of the Bells”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 곡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성경에 극히 제한적으로 종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만큼 종소리에 관한 가사로 만들 수 있는 곡 자체가 거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곡은 종소리에 관한 성경말씀을 가사로 하는 유일한 작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편 가사와 음악과의 일치, 또는 몬테베르디의 제2작법적 관점에서, 음악의 가사에 대한 철저한 종속에 대해 생각한다면 종소리에 관한 가사와 종소리화성으로 만들어진 음악과의 만남은, 어쩌면 태초부터 예정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만남이 아닐 수 없다. 종소리에 관한 가사를 종소리화성 이외의 어떤 다른 음악이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종소리화성은 단지 위 성경구절만 음악적으로 표현하기위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중요성이 감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곡은 상반되는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내용은 곡을 보는 관점의 깊이에 따라 달라진다. 우선 겉으로 두드러지는 내용은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이다. 이는 구약에서 만나는 율법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요 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종소리화성에서의 특징적인 음정인 증4도와 단9도(또는 그 전위인 장7도), 또 여러 긴장도 높은 음들의 마주침으로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특히 이 곡에서는 f♯-c의 긴장과 b-b♭의 긴장이 곡의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데 이 음정들은 각각 다른 종소리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마디3에서의 0b화음(d-b-f♯-c-f-b♭)에서는 동시에 나타나 매우 압축된 형태를 보인다.

  또한 곡의 앞부분에서 앨토가 거의 움직임 없이 가사를 읊조리는 듯한 분위기로 일관하는 것도 무거운 두려움의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마디7에서 우리는 f♯-c의 긴장 외에도 c와 c♯의 부딪침, e와  e♭의 부딪침 등을 들을 수 있는데 이는 이 마디에서는 0c 외에도 f♯의 보조음으로서의 e가 부가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가음들의 사용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불투명하게 만들고 어둡게 만든다. 19, 20마디의 가사 “so that it will not tear”는 매우 격앙된 표현으로 나타나 상당한 음악적 충격으로 느껴지는데, 이는 이 곡에서 가장 중요한 가사인 “so that he will not die”와 댓구를 이루기 위한 배려이다. (실제로 19,20마디의 가사는 곡의 말미에 회상하듯이 반복된다.)

 

  그렇다면 왜 “so that he will not die”라는 가사가 가장 중요한가? 아까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곡은 두 가지 상반된 내용을 노래하는데 겉보기에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것 같지만, 보다 깊은 관점에서 이 곡은 바로 이 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진정한 뜻, 곧 생명이 죽지 않도록 배려하시는 그 손길, 마침내 죄인의 생명도 죽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장엄하고도 세심한 사랑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결국 종소리는 신약시대의 복음을 상징하는 축복의 소리인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소식이 오기까지 이스라엘은 참으로 많은 시간을 견뎌야만했고 기다려야했다. 그들이 율법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약 15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고, 예수께서 오시기 약 400년 전부터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예언자도 나오지 않아 영적으로는 흑암기였고 정치적으로는 외부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특히 안티오쿠스 4세, 헤롯 대왕 등의 폭정으로 인하여 죽는 것과 사는 것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 그런 시대가 흘러가고 있었다.

  이 노래는 그와 같은 기다림을 묘사한다. 아니, 어찌 보면 그런 암울한 분위기가 끝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마지막에서의 “so that he will not die”의 반복은 분명 하나님의 생명을 사랑하시는 뜨거운 심정을 그만큼 깊은 차원에서 노래하고 있다. 사실 이와 같은 따뜻함과 부드러움은 -짐작할 수 있듯이- 종소리화성의 전통화성적 성격에 이미 내재되어 있지만 특히 곡의 말미에 성악파트가 종소리화성을 인성의 범위 안에서 원형 그대로 천천히 노래하는 부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172마디부터 앨토는 0G의 두 번째 음부터 마지막 음까지를 천천히 노래한다. 물론 그와 동시에 피아노의 왼손 파트는 이 화음의 첫 번째 음인 b를 마지막음의 이명동음인 f♯과 함께 지속적으로 연주하여 화성적 안정감을, 나아가 종지적 효과를 꾀한다. 여기서의 화음이 0g가 아닌 것은 가사가 보다 밝은 희망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곡에서 긴장관계로 작용하는 네 음(c-f♯, b-b♭) 중 b와 f♯이 여기서는 완전5도의 음정을 구성하여 새로운 반전을 암시한다. 172-173마디에서 피아노의 오른손은 곡의 첫 두 마디의 역행(retrograde)의 변주다. 역행은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것이니 이는 시간을 초월하여 운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암시다.

  결국 오랜 기다림 후에 마침내 구원이 임한다고 하는 평범한 진리가 이 곡에 녹아져있다. 참고로 이 곡의 가사를 영어로, 그것도  NIV로 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성경이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원문을 가장 잘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 이 곡이 가능한 한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지기 원하기 때문이다.


모노드라마

  모노드라마는 현대음악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A. Schönberg의 소프라노를 위한 단악장 오페라 ‘기다림’(Erwartung)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다분히 연극적이고 표현주의적이다.

  이 곡이 단순히 가곡의 성격을 넘어서 모노드라마의 성격을 갖는 것은 이 곡의 가사가 단순히 무엇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 어떤 동작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의 상황은 보다 내면적 상황을 의미한다. “종소리가 나면 죽지 않으리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종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으리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말을 들었을 때의 아론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를 내가, 또는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들었다면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분명 우리는 어떤 의미로든 한계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한편 이토록 절대 절명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모세의 심경 또한 어떠했을까! 이 곡은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의 위치에서, 때로는 모세의 입장에서 죽음과 생명을 오가는 극한상황을, 또 정신적 공황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표현주의적 모노드라마의 성격을 갖는다. 물론 그렇다고 이 곡을 부르는 가수가 특별한 옷을 입는다거나 또는 특별한 행위를 나타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필요한 소도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이 담당한다. 때로는 효과음악적으로...) 그러나 가수는 자신이 현재 모노드라마의 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해야 하며 또 그런 상황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동작을 자연스럽게 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청중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노래를 듣는다는 입장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장면을 눈에 그려야 할 것이다. 때로는 형 아론에게 하나님의 엄위로운, 그러나 극도로 위험한 명령을 전해야하는 모세의 모습을, 때로는 제사를 지내러 성소로 들어가는 아론의 무거운 행동을 상상해야 할 것이며 때로는 아론 자신이 되어 종소리가 제대로 울리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에 가서 “so that he will not die”의 메시지가 생명의 메시지로 전해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이 곡은 곡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깊은 내면세계로 들어가는데, 내면의 상황을 드러낼수록 곡은 표현주의적인 성격을 강하게 갖는다. 이와 같은 고통스럽고도 점진적인 과정을 예로부터 탄식저음(Lamento-Baß)이라도고 불리우는 반음계(혹은 온음계) 하행진행이 효과적으로 묘사했는데, 이 곡에서도 이와 유사한 진행은 주제적인 성격을 띠며 때로는 매우 긴 시간적 범위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7~15마디에 걸쳐 성악파트에서 나타나는 진행은 b♭이 한 옥타브 위로 나타나는 것과 그 이후에 다시 b가 나타난다는 변화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탄식저음이다. 21마디에서는 탄식저음이 맨 윗 성부에 나타나며 빠른 움직임을 갖는데 여기서 이미 탄식저음이 주제적 요소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반음계적 하행진행은 50마디에 이르러 매우 침울한 외침과 함께 극적인 효과를 이룬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단어의 반복이 갖는 복합적 의미에 대한 이해이다. 원래 이 부분에서의 ‘아론’은 ‘누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명령문에서 문법적으로는 주격인데, 여기서는 두 번 호격으로 쓰여 비통한 심정으로 형의 이름을 부르는 모세의 내적 상황을 표현한다. 여기서 종소리화성의 장조형이 쓰였는데 이는 상성부의 복잡한 화성음들에 가리워 특별히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전통 조성음악이 그러하듯이 희망과 따뜻함을 상징한다. 결국 모세는 처절하게 아론을 부르지만 피아노는 희망을 암시하는 복합적 장면이다. 

  55~57마디의 성악파트에서는 반음계적 하행진행과 종소리화성에서 특징적인 증4도와의 결합을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점진적인 주제 형성과정은 논리적으로 내면적 세계로 들어가는데 있어 매우 효과적이다. (우리는 이미 25~33마디에 걸쳐서 이와 유사한 진행을 발견할 수 있다. 단, 여기서는 상행진행으로 나타난다.) 반음계적 하행진행은 98마디에서 더욱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보다 강도 높은 비극적 표현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뒤에 이어지는 0b와 연결되어 새로운 주제의 성격을 갖는다.


  특히 이 음형은 103마디까지 모두 세 번 반복되는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종소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는 것을 이미 언급했는데,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것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인 것을 생각한다면 종소리로 하나님 자신을 암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종소리화음에서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는 장6도 음정은 그 울림의 성격상 여러 음악적 요소들을 부드럽게 감싸는 특성이 있어 매우 자주 - 특히 베이스 성부에서 - 쓰인다.

  단어 ‘Bell’과 종소리화성과의 만남은 주지하듯이 숙명적이다. 물론 ‘Bell’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이 곡에서는 모든 화성이 종소리화성이나 그 변형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특별한 단어가 등장할 때 종소리화성 역시 거의 그 원형을 회복해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청각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각적 주석이라고 해야 할 만큼 강렬하고 직접적이다.

  61마디부터의 종소리화성의 원형의 지속적인 출현은 좀 특이한 상황이다. 여기서는 “before the Lord”라는 단어가 성소 안으로의 공간적 이동을 나타낸다. 즉, 61마디부터 아론은, 아니 우리 모두는 실제로 성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아론이 묵묵히 규례에 따라 여호와를 섬길 때 들리는 소리는 그가 입은 에봇에 달려있는 종에서 나는 소리일 뿐... 성악파트도 그런 이유로 약 다섯 마디를 쉬게 되는데 결국 여기서 고독하게 울리는 종소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상징하는 소리요, 우리를 시공을 초월하여 아론이 하나님을 섬기는 바로 그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을 섬기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종소리화성처럼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바로 리듬형(形)이다. 다음 악보에서 보듯 불규칙 적으로 반복하며 때로 빨리 움직이는 장식음과 같은 리듬형은 바로 종소리의 울림을 강하게 연상하게 하는데, 이는 실제로 옷에 달린 작은 종이 몸을 움직일 때 내는 소리는 매우 불규칙적이며 때로 거의 들리지 않을 듯 섬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리듬형은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이 곡의 중요한 주제적 요소로 쓰인다. 이 성소 장면(61~80마디)에서 이와 같은 리듬형은 그것과 별개인 것처럼 들리는 종소리화성과 동시에 연주되어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는 역시 여러 개의 종이 동시에 울리는 실제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물론 그 리듬형과 결합한 음정은 종소리화성에서 나온 것임은 자명하다. 마디3의 후반부에 나타나는 32분음표의 연속은 1b에 b♭이 첨가된 경우다. b♭이 첨가된 것은 - 이미 언급했듯이 - 이 곡에서 b-b♭의 긴장이 주제적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 리듬형은 그러나 단순히 섬세한 종소리의 잔영(殘影)으로만 머물러있지 않고 아래 악보에서처럼 음악의 법칙에 따라 변화하며 진화한다.


  83~147마디에 이르는 상당히 긴 부분은 모세의 극단적인 심적 상황을 표현한 부분으로 모세는 자신이 받은 엄위로운 말씀을 때로는 긴박하게, 때로는 호소하듯이 노래하는데 특히 이 부분은 인간 모세의 한계상황,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을 순간적인 템포변화와 반음계, 빠르고 심한 도약진행, 예기치 못한 음의 단절, 스타카토와 액센트, 글리산도, 피아노에 나타난 톤클러스터 등 거의 모든 극단적인 표현방법으로 묘사한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우리는 심히 연약한 모세를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역할이 너무 무겁고, 하나님이 너무 무섭기도 해서 도무지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는 나약하기까지 한 한 인간의 모습은... 사실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요,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닌가! 어쩌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 무서워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고 있으니 결코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사실 여기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학적으로 정신분열증에 가까울 것이다. 주지하듯이 이 질병은 유전적인 원인에 의해 또는 대개 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발병하며 증상으로는 논리 장애, 지각 장애, 감정표현의 장애가 나타난다. 이러한 병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나약함을 극명하게 묘사한다.

  모세의 두려움은 마침내 139마디의 피아노 파트에서 시작되는 ‘Dies irae’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니, 차라리 이제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오히려 차분하고 담담해졌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더 이상 죽음과 삶의 구분이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 조용히 생의 욕구까지도 절대자에게 맡기는 그런 마음을 그리기 위해 노래마저 숨을 멈춘다, 마치 139~142마디의 앨토의 글리산도가 마지막 숨이라도 되듯이. 나는 여기서 ‘12개의 거룩한 종소리’ 중 11번째 곡인 ‘Dies irae’의 14~43마디를 인용했다. 물론 맨 윗 성부는 제외하고 (이를 성악이 대체하고도 남는 효과가 있으므로) 또 앞뒤의 연결, 곡 전체의 통일성, 논리성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변주를 만드는 등의 배려를 잊지는 않았다.

  ‘12개의 거룩한 종소리’의 11번째 곡에서는 ‘Dies irae’ 선율이 점점와해되는 과정을 나타냈다. 여기서도 이 과정은 그대로 반복되는데 그 의미는 보다 명확하다. 즉, “so that he will not die”와 함께 어우러져, 죽음의 분위기에서 생명의 분위기로, 조심스런 그러나 분명한 대반전(大反轉)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편 그러한 종지의 과정 중에서 c-f♯의 관계가 더욱 확실히 드러나 이 음정의 주제적 역할을 다시금 분명히 하고 있으며, b-b♭의 관계 또한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171마디부터 저음부에서 나타나는 화성은 클러스터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0g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부족한 f♯은 상성부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압축되어 어려워진 화성은 세 번 반복되어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는데, 이는 부족한 우리의 이성으로는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함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마치 종소리가 반복되며 서서히 저물어가듯이 이 곡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작곡자)


(이 글은 “종소리화성”에서 발췌된 것으로 모든 주석은 생략되었습니다. 보다 자세한 곡의 해설과 분석은 “종소리화성”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격: 15,000 (두 권 한 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