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Image by arnie chou

2023 새찬양예술인회 주최 제 8 회 골방의 찬양 동영상 음악회

The 8th
Small Room Concert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우두머리라
그들은 골방에 거주하면서 주야로 자기 직분에
전념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
(역대상 9:33)


Those who were musicians, heads of Levite families, stayed in the rooms of the temple and were exempt from other duties because they were responsible for the work day and night.
(1 Chr. 9:33 NIV)

Greetings
인사말

골방의 찬양 동영상 음악회를 찾아오신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 특별한 음악회의 성서적 배경에 대해서는 여기서 반복하지 않을 것이므로 미리 제7회 골방의 찬양 음악회를 방문하셔서 서문도 읽어보시고 연주 동영상은 물론, 연주자들의 간증도 꼭 보시기 바랍니다. 제7회 골방의 찬양 음악회 바로 보기 (옆의 링크를 복사해서 주소창에 넣으세요): https://www.newpraise.org/small-room-7 금년엔 아마 지난 7년간의 그 어떤 때보다 놀라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보통 어떤 힘든 일들 후에 일어나지요. 예를 들어 사업이 망했는데 그 후에 주님 도우심으로 놀랍게 재기했다거나, 중병이 들었는데 놀랍게도 치유의 은혜를 체험했다거나… 매년 골방의 찬양을 준비하면서 이번엔 주님께서 어떤 귀한 찬양인들로 함께 하도록 하실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늘 기본적으로 함께 하는 새찬양예술인회가 있으니 한편 안심되는 부분도 있긴하지만요. 그런데 새찬양예술인회는 몇 분 되지 않아요. 게다가 금년엔 몇몇 분들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함께 하지 못하게 되니 연주할 분들이 거의 없을 뻔 하였어요. 게다가 이 연주회는 정확히 말하자면 연주회가 아니라 연주자들이 각자 하나님께 극진한(대상 16:25) 찬미의 제사를 드린 그 영상을 모아서 공개하는 것이므로 연주자들에게 연주비를 준다는가 하는 그런 것이 없어요. 본인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물(히 13:15)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받으셨고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면 (시 69:30, 31) 그것으로 가장 중요한 자기 삶의 목표를 (사43:21) 이룬 것이니 그것으로 본인이 감사하면 되는 것이지요. 새찬후는 그 영상, 그러니까 그 증거들을 모아서 공개하여 “과연 극진한 찬미의 제사란 어떤 것일까?”라는 교회의 질문에 답을 드리는 것 뿐이지요, 또 이를 통해 더 많은 전문음악인들이 주님께 “극진한 찬미”를 드리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지난 5월에 박혜림 자매에게 연락이 왔어요,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를 녹음했으니 한 번 들어보라고… 그 곡은 약 3년 전 제가 써준 곡이에요 (2020년 7월). 혜림 자매를 안 지가 그때까지 벌써 몇 년 되었는데 그동안 그녀의 찬양연주에 큰 감동을 받았으면서도 곡도 하나 써준 적이 없었는데 언젠가 어떤 감동으로 그 곡을 쓰게 되었어요.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어려운 삶과 아무도 모르는 고통이 느껴지는 듯 해서요. (물론 본인은 그런 마음을 부담스러워해요. 오히려 주님 은혜로 너무 잘 살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요. 참 씩씩한 자매에요. 나이는 저보다 많이 어린데 존경스럽기까지 하답니다.) 무엇보다도 눈이 안보인다는 것은 밤낮으로 깜깜한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게다가 자기 앞에서 자기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의 표정도 전혀 볼 수 없는 답답함이 평생 계속될 것인데 그저 제 상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많이 쓰여서 그런 곡을 쓰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그녀가 마치 시각장애가 없는 것처럼 놀랍게 어려운 곡들을 연주하는 것을 알기에, 정상적인 피아니스트도 어려워할 기교도 서슴치 않고 사용했어요. 그런데 좀 너무 과했는지 또 혜림 자매가 바쁘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아무튼 약 3년이 지나서야 그 곡을 녹음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그때가 마침 제가 한국에 일정이 있어서 한국 방문 중이었고, 마침 시간이 서로 맞아서 렛슨을 해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캄보디아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드디어 그 곡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의 골방의 찬양 음악회를 위한 동영상이 도착했어요! ㅎㄹㄹㅇ! (물론 그 동영상이 얼마나 큰 감동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는가 하는 것은 직접  체험해보시구요!) 그런데 그보다 약 한 달 전, 4월 초에 이상한 메일이… Sam Yoon 이라는 분에게 영어 메일이 왔어요. I was directed to this email from the newpraise.org web site. I'm interested in purchasing the sheet music or download file for "Praise to the Lord, Almighty" for violin solo by Johann Kim. Please reply back to this email with pricing information and how to go about purchasing it. Thank you. 그러니까 약 십여년 전 예랑 양이 연주했던 “다 찬양하여라”(https://youtu.be/sG7hYSpiobI) 동영상을 보고 그 악보를 구입하겠다고 제게 보내온 메일이었어요. 순간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어요… “아니 이 극어려운 곡을 연주하시겠다고? 정말 대단한 분이네… 이 곡은 그 이후 연주한 사람이 거의 없어 늘 나도 새 연주로 듣고싶었던 곡인데… 그런데 과연 이분이 연주할 수 있을까? 이분은 분명 바이올린 전공자 중에서도 아주 실력도 좋고 믿음이 좋은 분임이 분명해… 이번에 이 곡이 연주된다면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이 곡을 듣고싶으시다는 뜻일거야… 주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이후 메일을 통해 알아보니 이분의 삶은 저와 매우 비슷한 점이 많았어요, 음악을 무척 사랑하고 재능도 많고, 바이올린을 특히 사랑했는데, 처음엔 저처럼 다른 직업을 택했고, 저는 중간에 음악으로 왔지만 이분은 다른 직업을 계속 가지면서 계속 바이올린을 공부하신 분! 그분 연주를 들어보고 싶어 혹시 연주 동영상이 있다면 보내달라고 했더니 보내주신 동영상을 보니 전 어디 음대 교수님인 줄 알 정도였어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펫츠의 별명이 (바이올린 활이 너무 빨라) 기관총이라고 했는데거의 그 수준에 육박하는 튼튼한 기교에 영성이 흘러나오는 그런 연주였어요. 이런 귀한 연주자를 만나게 된 것은 제게 크나큰 복이지요! 그래서 몇 번 메일을 주고받으며 곡에 대한 설명도 하고 서로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도 하며 귀한 교제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과연 그분의 말씀대로 지난 6월 11일 자신의 교회(미국 어바인 온누리교회) 예배 특송으로 그 난곡을 연주하셨고 교회예배실황 동영상에 담긴 곡을 보내주셨어요. 비록 본인이 비전공자라고 하셨지만, 놀라운 수준의 연주였고, 또 골방의 찬양에 주님께서 보내주신 곡이라 생각하여 포함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 30일, 공식적으로는 금년 골방의 찬양 동영상을 받는 마지막 날, 저는 제 부족함으로 또 기도할 제목들이 있어서 하루를 구별하여 금식 중이었는데 오전에 한 동영상이 카톡으로 도착했어요. 어떤 작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사명”(The Way the Lord Went)… 그 곡은 2015년 초에 제가 인도하는 호산나앙상블, 특히 악장이었던 쏙니따 양의 바이올린 솔로를 위해 짧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만든 곡이었지요. 그런데 몇 년 전에 제 후배 목사가 지인 중에 작은 찬양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있는데 악보를 찾고 있다하여 보내드린 악보가 바로 그 곡이었어요. 그런데 그동안 아무 연락도 없었고 저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지휘자가 연주 동영상을 보내왔어요. 6월 25일 어떤 교회 예배 중에 찬양으로 연주했다고… 그 연주를 들으며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요! 연주도 좋았고 그 곡의 가사는 정말 마음을 파고들었고, 또 그 동영상이 바로 골방의 찬양 마감일에 도착했으니 이는 주님께서 “금년 골방의 찬양 음악회에 이 곡은 반드시 넣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받은 동영상에 가사도 추가하고 교회이름, 독주자 이름 등을 넣어 새로 만들었답니다. 어떻게 그렇게 날짜를 알고 곡이 모이는지… 참 신기하지요? 그리고 그동안 제가 쓰게 된 곡들이 좀 있었는데 피아노 연주자가 없어서 실제 녹화는 하지 못했지만 노래할 사람은 있었기에 컴퓨터로 피아노 반주를 대신해서 “실험적 녹음”을 하게된 두 곡이 있어요. 첫 곡은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Testimony of Mary Magdalene), 두번째 곡은 마태복음 1장을 중심으로한 “수태고지”인데요, 이 곡들은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한 가지 분명한 깨달음이 제 마음에 메아리치는 듯 하였습니다. “이 음악회를 준비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깨달음! 그런데 찬양이 제물이라면 그건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성경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 명령대로 바치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중지시키고 대신 뿔이 수풀에 걸린 수양(창 22:13)을 번제로 준비하셨지요? 모세의 성막을 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온 여러 보석들은 실은 얼마 전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 애굽사람들로 하여금 떠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도록 하신 것이고(출 12:35-36/ 35:21-22), 심지어 노아 홍수가 끝나고 예물을 드릴 때를 가만 보면(창8:20) 제물로 드린 정결한 동물들은 미리 일곱쌍씩 들이도록 하나님께서 명하셨으니(창 7:2-3)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제물로 드리고도 넉넉히 남도록! 물론 그것을 잘 다듬고 준비해서 제물로 드리는 약간의 수고는 사람이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 준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결국 골방의 찬양의 찬미의 제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작곡자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보석과도 같은 영감을, 노아 방주에 탄 일곱 정결한 동물처럼 칠배나 주시고, 연주자들에게는 음악의 재능과 연습할 수 있는 환경과 공부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도 주셨으니 그저 주님께서 다 하시고 우리는 포장만 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또 상을 주시겠다니 참으로 그분의 친 자식이 아니라면 하지 않으실 그런 대우가 아닙니까? 게다가 이번엔 연주자까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귀한 분들을 시기 적절하게 모아주셨으니… 주여, 주님 홀로 영광받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당연합니다! 그저 우리가 그 아름답고 완전하신 주님을 그만큼 아름답고 완전하게 찬양하지 못하는 것이 여전히 죄송하고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 그저 내년엔 좀 더 잘 하도록 도와주세요. 아멘! (아울러 수고한 모든 연주자들, 힘주시고 그 가정과 섬기는 교회를 복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내년엔 더욱 극진한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프놈펜에서 김명환 목사 (교회음악 작곡가/ 새찬양후원회 설립자)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arr. Johann Kim for pianist Hyerim Park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arr. Johann Kim for pianist Hyerim Park)
Play Video

[연주자 간증] 이 곡은 사람의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과, 그 고난 이후의 승리와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 제 삶의 주관자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아래는 연주자가 작곡자에게 보낸 글 중에서) 김명환 목사님, 목사님의 글을 읽고 답장을 씁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21년 1~2월쯤에 이 곡의 연습을 시작한 것 같은데, 이런저런 일정들로 인해 연습을 중단했다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다가 이제야 이 곡을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곡의 제목을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주제에 의한 초절기교 연습곡”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만큼 테크닉적으로 매우 어렵고 음악적으로도 난해하고 고민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 곡에 대한 목사님의 설명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마침 목사님과 시간이 딱 맞아서 레슨을 받을 수 있었고 큰 도움이 되었어요. 바쁘신 중에 시간 내어 레슨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지난 4월 말에 다른 연주 일정이 있어서 연습 시간이 부족하여, 5월 중순까지 영상을 제출해야 하는 이번 ‘골방의 찬양’에는 참가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목사님께 말씀드렸는데, 다행히 영상을 늦게 제출해도 괜찮다고 하셔서 이번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찬양 연주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찬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Far Away in the Depths of My Spirit (W. G. Cooper/ W.D. Cornell/ arr. Johann Kim) &
‘Tis So Sweet to Walk with Jesus (A. B. Simpson/ arr. Johann Kim)

새찬양 피아노트리오 (바이올린: 이영희/ 첼로: 김주경/ 피아노: 김효진)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piano trio by Johann Kim (새찬양피아노트리오/ 이영희,김주경,김효진)
Play Video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for piano trio by Johann Kim (새찬양 피아노트리오/ 이영희,김주경,김효진)
Play Video

[연주자 간증] 이영희 (바이올리니스트/ 새찬양예술인회 회장) 이번찬양은 뜻깊게 다양한 연령층으로, 찬양꿈나무인 김주경학생과 한창 연주활동과 후진양성에 기여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김효진선생님과 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연습하고 녹화하는 내내 진지했고 별탈없이 행복하게 끝냈습니다. 지난 골방의 찬양때는 녹화하는날 아들이 다치는등 힘든 와중에 하느라 정말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이번에는 행복하게 했습니다. 2월 아모텍 행사에 연주하게 되어 준비하다가 아예 골방의찬양까지 함께 하게되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두곡의 찬양을 오롯이 주님께 드립니다.~ 김효진 (피아니스트) 이번 찬양연주 이후 사실 큰 하나님의 응답이나 역사하심은 없었지만 평소 하나님 나라 확장에 달란트를 사용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게되어서 기뻤고 특히 두 연주자 분들의 탁월함과 선한 품성으로 인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역에 동참케 되어서 기쁘고 영광스러웠습니다. 향후 연주사역에서도 찬양이 우상이 되지않기를바라며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고 주님께서 기쁘시게여기시는 찬양사역에 지속적으로 동참할 수 있게되기를 소망합니다. 귀한 사역에 동참할수있는 기회를 주신 목사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주경 (첼리스트) 교회에서 나고 자란 저는 제 옆에는 몸보다 큰 악기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악기와같이 하루를 보내는게 재밌어지고, 익숙해지고, 어느새 내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갈때 쯤.. 뒤를 돌아보니 분명 사람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시작했던 순수한 모습의 나는 없고 음악과 악기가 곧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경쟁, 성과 등으로 욕심이 뻗어 나가기 시작했으며 결국 다른 인간적인 목표에 눈이 멀어 근본적으로 이것을 왜 하는지를 아예 잊어버린 나 만이 남겨져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홀로 기도하고 회개하며 찬양을 연주하며 내가 무엇을 위해, 어떤 근거로 내가 이 악기를 하는지를 되새겼고 제가 음악을 하는 것은 오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 하는 것임을 늦게나마 깨달았고, 이 사실을 여전히 흔들릴때가 많은 연약한 제 자신에게 그리고 같은 고민에 빠져있는 음악 동료들에게 계속해서 알려주고있습니다.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고 서로를 사랑하기보다 미워하는 모습이 계속 보여지는 현대사회를 아픈 마음으로 바라볼때,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해결책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 뿐 이라고 생각하며 그 사랑을 음악으로써 전할때 제가 쓰임 받을 수있다면 그것이 저의 인생과 음악을 하는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좋은 기회로 골방의 찬양을 함께하면서 훌륭하신 선생님들과 그리고 마음으로만 기도해왔던 목사님의 찬양곡을 초연 할 수 있어 영광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에 힘쓰시는 믿음의 선배님들의 그 귀한 사역들에 저 또한 힘이 될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하고 항상 중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raise to the Lord Almighty
다 찬양하여라 (arr. Johann Kim for violin solo)

Praise to the Lord for violin solo 다 찬양하여라 (Johann Kim/ Violin: Sam Yoon/ 6-11-2023)
Play Video

[곡해설] 바이올린은 비록 작은 악기이나 그 가능성은 너무나 큰 악기이다. 클래식 음악에선 약방의 감초처럼 거의 안들어가는 데가 없을 정도인 것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이올린을 위해 쓰여진 수만 곡 중에서 가장 예술적 수준이 높고 기교적으로도 힘든 곡이 무엇인가 바이올린 전공자에게 물어본다면 아마 대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의 독주파트야말로 바이올린 음악의 백미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음악을 깊이있게 듣는 사람이라면 무반주 바이올린 곡이 주는 소리의 깊이와 예술적 높이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음향적인 이유도 있는데, 사실 바이올린 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바로 무반주 바이올린 곡인 것이다. 바이올린 소리는 트럼펫처럼 크지 않다. 그래서 다른 악기와 함께 연주할 경우, 화성적인 보강은 되지만 그만큼 바이올린의 섬세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반주 바이올린곡은 왜 하나같이 어려운가? 이는 바이올린이 원래는 선율악기이기 때문이요, 그런데 화성까지 동시에 연주해야하니 참으로 높은 기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피아노로 화성을 연주하는 것은 아이들도 쉽게 할 수 있지만 바이올린으로 삼화음을 연주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라 대위법적인 기교까지 사용한다면, 정말 최고 수준의 기교가 필요한 것이다. 대위법적인 기교란 한 마디로 여러 성부가 각자의 선율을 노래하며 진행하는 것인데… 그 작은 바이올린 네 줄로 세 성부가 따로 진행하며 노래한다면, 이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수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곡들, 특히 그중에서도 파르티타 2번에 나오는 샤콘느(Chaconne)는 모든 바이올리니스트가 사랑하는 곡이며 동시에 넘어야 할 큰 산인 것이다. 이번에 연주된 곡은 바로 그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곡, 특히 매 소나타 두번째 곡으로 나타나는 푸가를 모범으로 만들어진 곡으로 약 30년 전 쯤 한국 바이올리니스트 김은영의 작품위촉으로 만들어졌다. 3성부의 푸가로 제시되는 이 곡은 중간부분에 단조로 바뀌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타낸다. 그리고 주제의 전위(inversion)도 나타나는 등 대위법의 여러 기교들이 쓰인 곡으로 연주자의 최대의 기량과 영성이 요구되는 곡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고백
Testimony of Mary Magdalene

이경은 (소프라노), 조은혜 (피아노) (김명환 곡)

Testimony of Mary Magdalene (Monodrama) for soprano and piano by Johann Kim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 모노드라마 (김명환)
Play Video

[연주자 간증] 이경은 선교사 (소프라노) 사실 목사님께 곡을 처음 받았을때 생소하게만 느껴졌던 모노드라마. 막달라 마리아의 생생한 증언이 찬양곡으로 씌여져 그 고백을 읽어 감에 어느새... 나는 울고 있었다. 무덤앞에서... 성경의 한 부분이 살아서 눈앞에 보여지기까지... 주를 찾으며 울고 있는 막달라마리아가 눈물을 훔치며 먹먹한 마음으로 주를 찾을 때 나또한 그를 찾으며 부른 노래~ "주님의 몸을 내가 가져가리이다. 못 박힌 손과 발, 창에 허리 찔린 몸..내 향유 발라드리리라..." 뜨거운 태양에 눈부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통을 바라보며 아직도 선명한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피 그리고 그 분의 절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마침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독생자 예수님의 부활! "랍오니여! 내 주님" 네, 주님 제 곁에 계시지요! 본 것 그대로의 증언이 나의 노래가 되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내가 본 것을 말함으로 그들도 주를 보았으면...!) 조은혜 선교사 (피아노) 7년 전 이스라엘로 떠났던 저희 가족들... 마리아의 깊은 절망과 고통의 삶이, 지난 날 외롭고 오직 주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광야에서의 삶과 교차되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려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버림받고 고통과 외로움에 절망속에서 살아 내야 했던 막달라 마리아! 예수 그리스도 주님을 만나 고침 받고 죄의 용서와 기쁨으로 회복된 삶은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자신을 드렸고, 주님은 은총 가운데 부활의 첫 증인으로 그녀를 만나주셨으니, 그녀의 주님을 향한 애절한 노래가 제 가슴에서도 흘렀습니다. 저희 가족을 오늘까지 인도해주신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은 감사의 눈물로 제 영혼에 흐르며, 이경은 사모님의 마음 다해 드리시는 찬송과 어우러져, 제 마음 엮어모아 주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사로 마디마디 건반에서 춤을 추며 올려드립니다.

[곡목해설] (한글 및 영어) 아마도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 또는 특별히 택함을 받은 자가 아닌 사람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중요한 인물은 찾기 힘들 것이다. 그녀는 예수를 만나 일곱 귀신으로 인한 고통을 해결받고(눅 8:2), 예수와 함께 여행하며 직접 그 가르침을 배운 자이며(눅 8:1-3), 예수의 달린 십자가를 직접 목도했던 자요(마 27:56, 막 15:40, 요 19:25), 당일 무덤 까지 함께 갔던 자요(마 27:61),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그날 무덤 속까지 들어가서 그 시체를 어떻게 둔 것까지 확인한 자요(눅23:55), 그의 몸에 바르고자 향품을 준비해둔 자 중 하나요(막 16:1, 눅 23:55-56), 사흘 후 예수의 무덤에 찾아가(마 28:1, 막 15:47, 요 20:1) 그의 부활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듣고 이를 증거하라는 명령을 듣고 이를 제자들에게 그대로 증거한 자(눅 24:10, 요 20:18)이다. 이런 말씀들을 자세히 보면 다른 마리아도 함께 있었지만 성경기자들은 유독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그 이름을 기록하고 있고, 심지어 막 16:9에는 아예 “예수께서 살아나신 후 일곱 귀신을 쫓아내셨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고 기록되었으니… 이와 같이 예수의 생애 전반에 걸쳐 매우 능동적으로, 또 섭리적으로 모두 참여한 자가 또 누가 있겠는가? 또한 그녀는 여전히 마 26, 요 12에 기록된 베다니의 죄 많은 여인 (눅 7:37에는 동네 이름이 나와있지 않다.)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다. (특별히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는 향유, 또는 향품에 대한 공통점으로 인해…) 한편 그의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주지하다시피 마리아는 여자의 이름이요 막달라 (מגדל)는 그가 태어난 지명이름인데, 이 작은 도시는 갈릴리 호수의 서쪽에 있는 도시로 그 뜻은“망대, 탑”을 의미한다. 망대는 무엇인가? 바로 높이서 모든 것을 다 보기 위함이 아닌가? 그녀가 그런 이름을 가진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 자신을 망대요, 탑으로 생각했었다면 이는 논리의 비약인가? 설사 그럴지는 몰라도 그녀를 망대라는 이름의 도시에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본다면, 과연 막달라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예수의 삶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증거를 위해 세우신 너무나 중요한 증인임에 틀림없다. (요즘 말로 하면 예수의 삶 전반에 걸쳐 증거를 모으고자 계속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 유튜버처럼…) 그런데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의 그 모든 취재 동기에 대해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바로 이 곡을 쓰게된 동기가 되는 구절로 요 20:11-18까지의 말씀이다. 특히 11절에서 우리는 다른 성경에서 보지 못하는 단어를 본다. (눅 24:4에는 근심했다는 표현이 나오는 대목이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것도 무덤 밖에서, 그것도 서서… 성경기자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녀가 “울면서”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요한은 한번은 이 단어 “클라이오”(κλαίω)의 현재분사, 한번은 동사를 써서 매우 입체적으로 그녀의 울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 단어의 뜻은 “울다, 통곡하다”의 뜻으로 요 11:33에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통곡했던 그 동생 마리아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그에 반해 “다크뤼오”(δακρύω)는“눈물을 흘리는 (조용한) 울음”을 뜻하며 마리아의 통곡을 듣고 함께 눈물 흘리시는 예수를 묘사할 때(요 11:35) 쓰인 단어이다. 사람들이 제일 통곡하며 울 때가 바로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을 때가 아닌가? 이 단어는 그렇게 처절한 단어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게 울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단어가 의미하는 그 울음이야말로 그녀의 가장 깊은 동기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진실되고 끝없는 사랑이었고 헌신이었다. 놀라운 것은 예수의 힘없고 비참한 죽음을 목도했음에도 그 사랑이 식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의미심장한 울음에서 이 곡은, 아니 이 모노드라마 (Monodrama)는 시작된다. 2023년 성금요일에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읽던 이 말씀은 곧 나의 고백이 되었다. 어쩌면 막달라 마리아의 삶은 우리 모두의 삶과 다르지 않으리라… 일곱 귀신이 들려 고통 당하고 죄악 가운데 거하던 그녀, 바로 내 모습이 아니던가? 아니, 우리는 일곱 귀신이 아니라, 물욕, 명예욕, 탐욕, 음욕, 교만, 자랑, 미움, 거짓, 질투, 등 셀 수 없는 귀신에 들려있지는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카톨릭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성자로 세운 것은 나름 타당성이 있으리라… 모노드라마는 한 사람의 깊은 내면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음악 형식이다. (사실 음악과 관계없는 모노드라마가 더 많은데 그것은 연극의 영역에 속한다.) 그녀의 울음이 나로 그녀의 가장 깊은 내면을 보게하였기에, 처음엔 노래로 시작된 곡이, 노래라기보다는 모노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음악사적으로 모노드라마는 그 예가 흔치 않은데 약 백년 전에(1924) 프라하에서 초연된 현대작곡가 쇤베르크(A. Schönberg)의 “기다림”(Erwartung)이 유명하다. 사실 내 곡은 모노드라마 와 노래 중간 쯤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리라, 왜냐하면 거의 모든 가사가 노래되어지므로. (대개 모노드라마는 평범하게 말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러나 그 드라마적 표현을 생각한다면 모노드라마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35-41 마디에 걸쳐 네 번이나“가져가리이다”를 반복, 71-74 마디에서“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고, 곧 “아직도 (귀에) 들린다”고 외치는 것, 77-86마디에서 과거에 배운 복음의 내용이 생각나서 노래하는 모습(요 3:16, 11:25), 87-90 마디에서 일곱 귀신에게 괴로움을 당하다가 치유받은 것을 기억하는 모습 등) 이 곡은 바그너의 반음계적 화성과 종소리화성에 기반을 둔다. 그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에서 바그너 는 반음계적 화성의 극단까지 시도하는데 이는 결국 조성의 붕괴를 야기하며 결국 독일어권에서는 쇤베르크의 표현주의와 무조음악이, 불어권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로 드뷔시(C. Debussy)의 인상파 음악이 시작된다. 이 곡은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바그너 음악의 또 다른 귀결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종소리 화성이 그것이다. (마디 80-81 참조) 이 곡의 한 가지 특징은 천사의 말이나 예수의 말씀을 마리아가 직접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악기로 대신하는 것이다. 사실 천사의 말을 사람인 독창자가 한다면 이는 그 신비로움을 반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경우 오히려 청중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는 기악이 더 예술적이고 영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11마디부터 나타나는 종소리화성은 천사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요 20:13)를 암시하며, 23-25 마디의 피아노는 예수의“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요 20:15)를, 91-92마디의 피아노는 예수가“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것 (요 20:16)을 나타내며 성경대로 각각 마리아의 말이 뒤따른다. 그러나 119-129마디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그 하신 말씀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하기에 이것은 마리아의 노래 에 포함되었다. (작곡자) It would be very difficult to find an important person like Mary Magdalene among those who have not been ordained, nor specifically chosen by God in the bible. She was the one healed by Jesus from being haunted by seven demons (Lk 8:2), travelling with Jesus, learning directly from Him (Lk 8:1-3), who witnessed to the crucifixion of Jesus (Mt 27:56, Mk 15:40, Joh 19:25), went to the tomb following his corpse on that day (Mt 27:61), even entered the tomb to see how his body was laid (Lk 23:55), was one of those women who prepared spices for Jesus (Mk 16:1, Lk 23:55-56), visited Jesus’ tomb after three days (Mt 28:1, Mk 15:47, Jo 20:1), eventually confirmed his resurrection after encountering Jesus, told the disciples what Jesus told her as commanded by Jesus (Lk 24:10, Jo 20:18). If studied carefully, these verses show a specific interest in revealing her name, while there were other Marys too, and in Mk 16:9, even it is said “Jesus appeared first to Mary Magdalene, out of whom he had driven seven demons,” all of which lead us to the question like “Is there any other who participated in Jesus’ general public life this actively and in a providential way like Mary Magdalene?” And still she is frequently regarded as a sinful woman in Bethany (Mt 26, Jh 12/in Lk 7:37 the name of the city is omitted), maybe because of the spice for burial which is the common denominator for M. M. and the anonymous sinful woman. And what does her name mean? As we know, Mary is a frequent name for a girl, and Magdala is her birth place, a small city on the West shore of the Sea of Galilee. Magdala itself means “watchtower, tower.” For what is watchtower? Isn’t it a device to see what happens in your vicinity from high above? If I say that she would have felt herself like watchtower, somehow obliged to behave like a watchtower, will it be too much a leap of logic? Maybe so, but nevertheless it would be worthwhile pondering on God’s providence for that. Having said that, we cannot deny that she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figures God chose, or secretly ordained, for undeniable evidences about Jesus’ life. (In today’s version, like a Youtuber or influencer totally dedicated to gather all the info about Jesus, taking videos and upload them right away to SNS.) However, John, in his gospel 20:11-18, gives a rare glimpse on her real motivation for covering all the aspects of Jesus’ life, which is the very verses that motivated me to write this piece. Especially in v.11, we see a very meaningful word that we cannot see in the same story written by others. (In Lk 24:4 it is written at least as “perplexed.”) But Mary was standing outside the tomb weeping; and so, as she wept, she stooped and looked into the tomb; (Jo 20:11) Yes, she was weeping, and that, outside the tomb, and that, standing… Further John describes her activities in detail, with the clause “as she wept.” Here John employs the verb “κλαίω”(claio/ weep), in two grammatical forms, present participle and active indicative form, describing her weeping almost three-dimensionally. The meaning of the word is “weep, cry,” which is also used to describe the bitter cry, or even wailing of Maria who lost her brother Lazarus in Jo 11:33. On the other hand, a similar word “δακρύω”(dacryo/ weep) means “shedding tears,” as Jesus wept out of sympathy for weeping Mary in Jo 11:35. Isn't it when people weep most bitterly when a loved one dies? “κλαίω”(weep) is that bitter word, and M. M. wept so. And the way she wept reveals her deepest motivation… and that is true, unending love, and sacrifice for Jesus. What is surprising to me is that her love never died out, even after she witnessed to the seemingly powerless and miserable death of Jesus on the cross. From that significant weeping begins this song, a monodrama. As I was pondering on the agony of Jesus on Good Friday in 2023, this verse, Jo 20:11 became my own testimony. In some sense the life of M. M. isn’t much different from our life… Being possessed by seven demons, living in sin… wasn’t it also my life? Are we not possessed by countless demons like avarice, greed for fame, lust, arrogance, boast, hatred, self-indulgence, lie, and envy? (In that sense it could be seen as almost legitimate that Catholic church canonized her.) Monodrama is deemed as suitable for describing inner world of an individual. (There are at least two types of monodrama, one for musical performance, and one for theater.) At first, I intended to write a song, but the deeper I delved into her story, the more could I feel the weight of her tears, which then changed the course of composition, even without my noticing it. In music history, we find just few examples of monodrama, among which “Erwartung”(Waiting) by A. Schönberg stands out. (premiered in Praha in 1924) In fact, my piece could be regarded as something between song and monodrama, for most of the text is sung and the piece can be performed as a song with some exaggerated expression. But if performed with some acting and facial expressions, suitable costume, and stage design, it is definitely a monodrama. (Consider also: repeating “(I will) take Him away” four times (M. 35-41); crying “Eli, Eli, Lama Sabachthani” (71-74); then immediate soliloquy (75); abrupt singing of gospel from memory (77-86), remembering miraculous freeing from seven demons (87-90)) Harmonically this piece is based on Wagnerian chromatic harmony and Bell harmony established by K. A. Hueber. In his renowned opera “Tristan und Isolde,” Wagner pursued chromaticism to the extreme, to the extent of destruction of tonal concept of Western traditional tonal system, entailing expressionistic atonal music represented by A. Schönberg in German speaking nations, and as a repulsive response to it from French speaking world, impressionistic music by C. Debussy. And my monodrama could be said to reveal another consequence of chromaticism, that is, Bell harmony (See M. 80-81). In this piece what the angel or Jesus said is not sung by the singer, but implied by piano. (Sure, What Jesus said to her to tell the disciples is sung by the singer, for that’s a part of her testimony.) In fact, if a human singer would sing what the angel said, the mystery will pretty much vanish. But if the audience already knows the context, and if they could engage their artistic and spiritual imagination while listening instrumental music alluding those sentences by angel or Jesus, the mystery will be kept, even elevated. (Phnom Penh, the composer)

수태고지 Annunciation I
김명환 (테너/ 바리톤) (김명환 곡/ 실험적 녹음/ 컴퓨터 반주)

수태고지 1 (칸타타처럼 듣는 성경/ 김명환/ Johann Kim/ Mat 1 Annunciation I)
Play Video

[곡목해설] 아마 크리스찬 작곡가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꿈이 있을 것이다, 성경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드는 꿈…  그래서 인류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성경이야기가 노래로, 기악음악으로, 또는 음악이 있는 드라마로 만들어져 왔고 그것은 교회에서 또는 음악회장에서 울려퍼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복음을 증거하기도 하였다. 나 역시 부족하나마 여러 장르의 성경관련 음악을 만들어왔고 또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 주를 찬양할 것이다. 이번에 새로 작곡된 곡 “수태고지”는 화성과 그 형식에 있어서 상당히 새로운 곡이다. “짧은 칸타타처럼 듣는”이라는 수식어가 어느 정도 이 곡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즉 이 곡은 성경 이야기를 칸타타의 복음사가(Evangelist)가 부르는 레치타티프(Recitativ)로, 또 그 장면에 나오는 인물의 노래로 표현하는 곡이다. 그런데 보통 칸타타는 합창도 추가되고 성경 말씀을 시처럼 각색한 다른 가사의 아리아도 추가되는데 반해 이 곡은 거의 성경말씀에만 의존한다. 그리고 길이도 짧은데 이는 실제로 같은 본문의 설교 바로 전에 연주되어 마치 설교본문을 음악적으로 읽어주는 듯한 기능을 갖는다. 즉, 이 곡은 특별한 음악예배가 아니라 보통의 주일예배에서 쉽게 불려질 수 있도록 고안된 곡이다. 그래서 악기 또한 피아노로 제한되었고 나중에 필요하더라도 한 두 악기 정도외에는 추가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필요한 성악가의 숫자도 두 세명 정도로 국한된다. 이번 곡은 복음사가(테너)와 천사(베이스) 두 사람의 가수를 필요로 하는데 이번 녹음은 컴퓨터 반주를 사용한 실험적 녹음으로 테너와 베이스 모두 작곡자 자신이 불렀다. (음정도 매우 까다롭고 주위에 달리 노래를 부탁할 성악가도 없어서) 즉, 이 곡은 성악가가 한 사람밖에 없는 경우에도 그가 음역이 어느 정도 넓다면 혼자서도 노래할 수 있는 곡이다. 화성적으로는 어쩌면 이 곡은 내가 평생 원하던 그런 화성적 자유로움으로 쓰게된 첫 곡이라 할 수 있다. 작곡가는 참 이상한 직업이다. 그가 좋은 작곡가라면 그의 음악은 어떤 원칙을 잘 따르게 되는데, 그래서 학자들은 그 곡을 분석하고 연구해서 그 속에 담긴 원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작곡가들은 그 원칙, 예를 들어 전통화성, 또는 현대적인 십이음기법, 또는 자신이 스스로 세운 원칙 등에 충실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그 원칙에서 자유로와지려는 노력 또한 지속하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산다는 점에서 이상한 직업이라는 말이다. 바로 전 작품인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에서 나는 전통화성의 끝자락에 있는 바그너의 트리스탄 아류화성과, 전통화성과 무조음악의 중간쯤에 있는 종소리화성과의 연결을 시도하였고 만족할만한 결과도 얻었는데, 앞으로 씨리즈로 만들어질 이 새로운 곡에서는 쉽게 말해 전통화성과 종소리화성을 초월하는 그 어떤 화성세계를 표현하려 노력하였다. 여기서 화성체계라는 말을 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어떤 새로운 체계를 만들기보다는 작곡자의 직관, 또는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의 영감을 따른 자유로움에 의지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작곡가라면 심지어 자신이 창조한 원칙이나 체계 안에서 완전한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이지만, 평생 그런 나름의 원칙으로 곡을 써왔다면, 이제는 마치 메시앙의 총열주의(total serialism)처럼 음악의 모든 요소를 자신이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그런 음악의 대척점에 있을 법한, 작곡자 자신조차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직감과 화성의 기쁨적인 선택과, 좀 더 거창하게 말한다면 설명할 수 없는 하늘의 영감에 보다 더 의지하는 (신명기 29:29) 그런 음악에 대한 소망이 이번 곡을 잉태한 근본적인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작곡가로서 무책임한 말이 아니라, 실은 작곡 후에 분석을 통해 나 자신도 배우게 될 새로운 원칙을 기대하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평생 조성음악과 종소리화성의 두 거대한 틀 안에서 얻은 여러 화성적 체험과 음향적 가능성에 대한 나의 지식을 어느 정도 신뢰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단어로 귀착되는데 바로 “신비(mystery)”이다. 그리고 이런 시도가 가치가 있는 것은, 성경이 신비로 가득 찬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곡에서 주제처럼 등장하는 화성의 체인(chain)은 나 자신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울림이다. 그리고 그 주제는 곡 전체를 통해 조금씩 변형되며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곡을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그 위에 상당한 뚜렷함으로 느껴지는 F 조 분위기가 함께 흘러가며 곡이 진행된다. 당연히 중간에 조성적인 부분이 나오는데 이는 조성화성부터 종소리화성, 그리고 나 자신도 규정하기 힘든 신비적 화성, 그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줄 수 있는 자유로움이다. 물론 이 자유로움은 전통화성과 무조음악을 묶을 수 있는 종소리화성의 야뉴스적 친화성과 관계가 깊다. 내가 그것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이번 곡과 같은 음악은 작곡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참고로 약 30년 전 나의 비엔나 유학시절의 논문제목이 “윤이상의 음악에 있어서의 구조와 자유로움”(Struktur und Freiheit im Schaffen Isang Yuns)이었는데, 어쩌면 그때부터 자유로움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 것이다. (수십년 전부터의 갈망을 새로운 열매로 맺게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사명
열린소리 선교오케스트라 (지휘: 황동균)

(이권희 원곡/ 김명환 편작곡/ 바이올린을 위한 소협주곡)

사명 (바이올린 소협주곡/ arr. 김명환/ The Way Lord Went concertino for violin and orchestra / subtext)
Play Video

[열린소리 선교오케스트라 소개] 열린소리 선교오케스트라는 34년전에 만들어졌어요. 코로나로 2년 중지되었지만 주님께서 기대 못했던 인원으로 채워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편성은 20명 정도이고 월 1 회 연 11 회 관현악으로 찬양을 원하는개척교회 방문연주합니다. 전공자로서 신앙인이면 저희 대원이 될 수 있습니다.

Epilogue
후기

구약에 보면 제사를 드릴 때 본인이 그 제물을 정성껏 준비해서 대제사장이 있는 곳까지 와서 제물을 드려달라고 할 때, 대제사장이 그 사람에게 교통비를 주고, 수고했다고 거마비를 주고 그러지 않지요. 찬미의 제물(히 13:15)은 바로 그런 제물입니다. 그래서 골방의 찬양은 코비드 전에 대면으로 할 때도 청중을 초청하지 않았어요, 오직 하나님만 받으시는 제물이기에… 그러나 성서적으로 볼 때 전문교회음악인들은 반드시 연주비를 받고 생활비도 후원받아야 합니다, 마치 대상 9:33 의 레위 우두머리로 이루어진 합창단처럼 교회는 교회음악인들을 후원해야합니다, 특별찬양연주를 교회음악인에게 의뢰한 경우 당연히 연주비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음악을 살리는 길이요,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교회음악은 결국 극진함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장신대 홍정수 교수는 언젠가 그렇게 말했지요, “교회에서 교회음악가를 내어쫓는 자는 다름아닌 교회이다” 라고. 그러나 우리 주위에 전문교회음악인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회음악인과 크리스찬 음악인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교회음악가는 전문적인 직업입니다, 음악은 물론 신학도 공부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찬양사역의 경험도 많이 쌓아야 합니다. 목회의 마음도 필요합니다. 사실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십여년은 족히 걸립니다. 독일에서는 교회음악인을 A, B, C 로 구분하여 A 등급에게는 집도 제공합니다. 당연하지요. 그것이 바흐나 텔레만과 같은 교회음악인이 탄생한 배경입니다. 단지 음대를 나오고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전문기독교음악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크리스찬 음악인입니다. 교회음악가는 평생 거의 교회음악만을 연주하고 크리스찬 음악인은 평생 주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이따금 찬양곡을 연주하는 것만 보아도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기독음악인들은 교회 밖에서 직업이 있지만 찬양을 사명으로 알고 주일에 기쁨으로 봉사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런 경우라도 생활이 어렵다면 교회는 그들의 수고에 마땅히 사례해야 합니다. 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이 필요하고 얼마나 긴장해야하고, 또 무거운 악기까지 들고 힘들게 와야하고, 또 연주 후에는 가야하고… 그런데 생활까지 어렵다면 교회는 그런 수고를 하는 그 어떤 분야의 사람에게라도 경비를 지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컴퓨터 전문가가 필요한데 교회에 그런 전문가가 있고 그분은 직업도 있고 생활도 넉넉하고 본인이 자원하여 주말에 틈을 내어 교회를 돕겠다면 보수를 지급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런 분이 교회에 있기는 한데 직업이 없어 생활이 어렵다면 교회는 그분의 수고에 마땅히 사례하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찬양이라는 이유만으로 봉사하라고 하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강요요,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한편 음악가가 생활이 넉넉한데 그들에게 연주를 부탁하는 교회가 형편이 어려운 경우에는 사례를 받지 않는 것이 성서적입니다. 생활이 넉넉한 사람들이 어려운 교회가 주는 사례를 받아 더욱 넉넉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 아름다운 그림은 아닐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의 성령의 감동에 따라 믿음으로 하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최대한 음악인들을 후원해야 할 것이요, 음악인들은 자신의 형편에 따라 후원금을 사양할 수도 있고 또는 지혜롭게 쓰면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전문교회음악인은 레위의 두목(대상 9:33)이라는 표현을 볼 때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도 있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음악적으로 신학적으로 제대로 공부하고 제대로 준비된 교회음악인이 필요합니다. 이는 교회가 설교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배에서 설교는 말씀선포로 그 중심에 있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타나시는 시간인데, 그렇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극진한 찬양을 준비하여 드리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환갑잔치에 부모님을 모셔놓고 음식은 라면 하나 대접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것은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골방의 찬양 음악회는 그래서 양면성이 있습니다. 교회에게는 음악인들을 어떻게 후원해야 하는가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는 것이요, 음악인들에게는 극진한 찬양의 수준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극진한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원하기는 기독음악인, 또 교회음악인들이 일년에 한 번은, 마치 일년 된 양을 주님께 바치듯, 그렇게 골방의 찬양 음악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이제 코비드가 사라졌다고 생각되니만큼 내년부터는 대면 골방의 찬양 음악회도 다시 시작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그렇다해도 동영상으로 하는 골방의 찬양 음악회는 계속 될 것입니다. 전세계의 기독전문음악인들이 가장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길이니까요. 그리고 연주자들은 각자 하나님께 드릴 곡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작곡가로서 곡을 쓰는 사람이지만 제 곡보다 훨씬 귀하고 좋은 곡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연주자들이 스스로 좋은 곡들을 발견하고 연습해서 주님께 올리기를 기대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라면 그것이 누구의 곡이든 상관없겠지요, 물론 믿음있고 개인적 신앙고백이 분명한 작곡가의 곡이라야 하겠지만요. 최고의 영성과 최고의 예술성, 그리고 최고의 준비로 일생일대의 찬미의 제물을 준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천국에 갔을 때 주님께서 “네가 2024년에 골방의 찬양 음악회 때 내게 올린 그 찬양은 정말 극진하더구나! 내가 참 기쁘게 흠향하였다. 참 잘 하였도다!” 라는 말씀 한 마디만 듣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완전 성공한 삶이었다고 모두가 기뻐할 수 있도록! 아멘! (7, 8월, 아니 그 후에도 몇몇 분의 찬양이 추가될 것입니다. 좀 늦더라도 하나님께 극진한 찬미의 제물을 준비해서 올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골방찬양의 정신이니까요.)

bottom of page